허성도는 모친의 극성스러운 신앙에 힘입어 착실히 교회에 출석하며 성장을 했다. 총명한 그는 서당 훈장으로부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받았다. 안동 계남소학교에서 공부했고 1915년에는 안의와선교사가 설립한 계성중학교에 입학해 안의와 목사의 신앙지도를 받았다. 중학교 5학년 재학 시 계성중학 한문선생 남성정교회 이만집목사와 함께 3.1운동 을 주도하고 이목사의 지시를 받아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3월 8일 대구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펼치다가 검속되었다. 허성도는 형장에서 검거되지 않고 뒤에 남아 같은 동료인 김수길 이영식 이기명 이종식 등 동료들과 함께 조선인 상인들에게 철시협조공문을 보내고 친일파 조선인과 일본 관리들에게 경고문을 보내 3.1민족혼이 계속해서 계승되고 있음을 알게하여 간담이 서늘하게 해 주었다.
1919년 4월 18일 결석재판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체포되어 수형을 살았다. 계성학교시절 그는 애국운동뿐 아니라 학생전도대에 소속되어 산간을 전도지를 들고 헤매기도 했다. 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는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년동안 사회주의 운동을 몸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만주 러시아 상해 등지를 떠돌아 다녔으나 사회주의의 허상을 깨닫고 귀국했다. 포항시 죽도동에 있는 이자성의 딸 이목덕여사와 결혼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25년 9월 명치대 영문학부 영문학과에 편입학하여 1927년 가을학기에 졸업을 했다. 졸업 후 일본 동경지역소 토목과에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야간에 일본 신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귀국 경주군 서면 운대리 교회 조사로 공식적인 교역생활에 접어들었고 이듬해 1937년 사월교회로 옮겨 봉직하다가 성직을 떠났다. 1938년 신사참배 가결한 후 환멸을 느껴 목숨보다 귀한 목회를 포기했다.
성직을 떠나 다시 공무원이 되어 충북 도청 토목과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청주제일교회 구연직목사에게 발견되어 제2의 소명을 받게 된다. 1940년 청주제일교회에서 실시하던 고등성경학교 교수가 되어 성직에 귀임했고 1941년 6월 15일에는 충복노호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청주 제2교회를 담임해 부임했다. 1943년에는 청주제2교회를 떠나 충북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에 연풍교회에 부임했다.
일경은 궁정요배를 강요하고 4복음 이외 사용을 금했으나 그는 궁정요배를 거부하고 계시록을 본문으로 강해 설교를 했다. 허목사는 마지막 나타날 짐승을 일본으로 본 것이다.
교회를 '농민청장년 보충병 양성소'로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일경의 요구에 거절 일경에 체포되어 경찰서 구치소 충주, 청주형무소,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면서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며칠씩 굶기고 진수성찬을 차려주며 신사에 절하면 먹어도 좋다고 했지만 그는 다니엘의 신앙으로 굶어 죽었으니 주려 죽을지언정 우상에 바쳐진 제물은 먹을 수 없다던 다니엘의 신앙절개가 허목사를 무장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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