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택규는 1902년 2월 8일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면 고읍동에서 태어났다. 숭실전문을 거쳐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11월 23일 주일선거를 반대하여 공산당에게 구금되었으며, 1949년 12월 19일 정주중앙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기독교도연맹 가입을 거부하여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어 행방불명되었다.
소학교 졸업.
숭실중학교 졸업. 숭실전문학교 졸업 1941년 평양신학교 졸업(36회) 덕흥교회, 정주중앙교회, 평양신학교 상임이사 및 교수
최택규는 어려서 한문을 읽었고 고향마을 소학교를 거쳐 평양으로 나가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신학교시절 교사로 봉직해 달라는 요청도 거절하고 직접 순교에 투신해야겠다며 수구교회 조사로 뛰어들어 평신을 졸업했다. 1941년 평양신학교를 36회로 졸업하고 평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덕흥교회에 부임해서 4년을 목회하고 8.15해방을 맞이했다.
1946년 11월 3일 주일선거는 공산주의 정권과 5도연합노회 지도자들과의 피할 수 없는 운명적 대결이었고 의외의 투표저조로 공산주의가 참패를 당했다. 최목사의 주일설교제목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것이었고 내무서원들은 무장을 하고 교회로 뛰어들어 최목사를 강단에서 끌어내려 연행했고 이 일로 최목사는 요시찰 인물이 되어 보위부원이 교회에 상주하는 등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 이북 5개 노회가 연합회를 형성 연합노회는 남과 북이 통일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총회구실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합노회는 자체적으로 신학교도 운영했다. 평동노회장 직을 봉직하는 최목사의 역할도 지대했다. 그의 영향력은 1946년 11월 3일 실시된 주일 선거에서 유감없이 발휘 되었다. 주일선거 반대는 공산주의 정권과 연합노회 지도자들과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이었다. 이 힘겨루기에서 공산정권은 어이없는 참패를 당했다. 의외로 투표율이 저조했던 것이다. 그날 최목사는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성경은 에스더서 4:1절-17절이었고 설교는 비장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날 공산당 내무서원들은 무장을 하고 교회로 뛰어들어 최목사를 교회 강단에서 끌어내려 연행해 버렸다. 그 사건이후 최목사는 내무성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행동의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치 보위부 요원을 덕흥교회에 상주시키고 목사의 프로그램 전체를 감시했다. 최목사의 행동은 물론 숨소리까지도 정치 보위부에 보고가 되었다.
1948년 끝내 덕흥교회를 사임하고 정주중앙교회로 자리를 옮겼고 평양신학교 상임이사가 되어 교수를 하며 수요일과 주일만 교회나와 설교를 하였다. 당국은 최목사의 신학교 후배들까지 동원해서 회유했다. "협조하시요.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요" 그래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당국은 계속적으로 협박을 하고 정치 보위부원을 학교로 보내 기독교도연맹에 가입을 여러번 강요했으나 거절함으로 결국 최목사는 회유불가의 도장이 찍혀 1949년 12월 19일 정치 보위부원이 무장까지하고 교회 사택으로 찾아와 연행 평양 형무소에 가두었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처형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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