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4월 21일 평북 정주에서 출생했으며, 3·1운동의 33인 중 한 사람인 이명룡 장로의 2남이다.
중국에서 금릉대학을 졸업했으며, 정주교회 장로로 있을 때 공산당의 주일선거를 반대하였고, 1947년 소련군 정보기관에 연행되었다가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숭실중학교 졸업. 숭실전문학교 재학.
금릉대학 편입 졸업.
1946년 봄 정주교회에서 장로장립.
이경선은 숭실중학교를 거쳐 숭실전문 시절 20세때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인 아버지는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아들 경선은 학생들과 함께 평양시가지를 행진했다. 1919년 삼일운동 때 20세 나이로 평양시가지를 행진 쫏기는 몸이 되어 만주 에 가서 매부 서훈장로 댁에서 금릉대학을 졸업하고 남경에서 사업을 하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 일본인이 떠난 조선에서 정치의 꿈을 실현하고 싶었으나 해방과 동시에 김일성의 군대가 점령하자 아연했다.
공산당은 이경선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그는 만주에서 공산비적들의 만행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찾아준 것은 고마우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종교인이라고 냉담한 반응을 하고 공산당의 회유에 거부 과수원농사에만 몰두했다.
1946년 봄 이경선은 섬기는 정주교회에서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이장로가 장로가 되고나서 맞게되는 3.1절행사는 남다른 감회가 있었다. 그러나 민족이니 이념이니하는 3.1절기념행사는 공산주의 사고로는 사치한 것이라고 행사 자체를 막는 공산당에 항거 당시 청년회 회장인 김경선 장로의 주도로 장대현교회에 1만명이 모여 3월 1일 오전10시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제창 만세삼창을 불렀다.공산당은 무장군인까지 동원했지만 손하나 쓸수 없게 되자 3.1기념행사 주동자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와같은 와중에 1946년 11월 3일 주일선거도 거부하여 5도 연합노회가 항거 공산당이 계획했던 100%선거 참여 목표에 훨씬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1947년 봄 월남을 권유하는 주변의 권유에도 공산당에 대한 동족의 향수때문에 피난가지 않고 있다가 결국 이경선장로는 보안서원들에게 체포되어 신의주 소련사령부로 압송되었다가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그 후 소식이 끊겨 그의 나이 48세에 순교의 반열에 동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