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계환 장로는 1912년 전북 고창군 공읍면 덕암리에서 덕암교회 장로 오병군의 2남으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 바쁜농사일을 하면서도 교회봉사를 우선하는 철저한신앙의 소유자이다. 1949년 10월 2일 장로가 되었고, 6·25동란중 교회를 떠나지 않고 지하실에서기도하면서 사수하다 후퇴하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1950년 10월 7일 용성리 마을 뒷산에서 심한 고문 끝에 생매장되었고, 그의 부인 김금이 집사와 4살난 아이, 9개월된 태아까지 학살되었다.
오계환 장로가 집안이 예수를믿게 된 것은 오계환의 조모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조모는 호남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은 전북지방 초대교인으로 시집오면서 복음도 함께 싸들고 와서 오씨 집안을 인가귀도하게 만들었으며 이들을 통하여 성실히 직분을 수행하게 하였다. 정통장로교 집안에서 믿음으로 자란 오계환은 덕암교회 뿐 아니라 전북, 전남노회 안에서도 투철한 신앙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청년시절 오계환은 믿음뿐 아니라 효자로도 소문나 있었다. 이웃 영광 법성면 월산교회 부유한 김용하장로는 큰 딸 김금이를 위하여 모든 청혼을 물리치고 오계환을 사위로 삼았다. 오계환의 아내 김금이 집사의 믿음은 오계환을 능가할 정도였고 추한 모습의 거지가 와도 손수 밥상을 정성껏 준비하여 대접하기를 즐겼고 불쌍한 사람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었다. 1949년 덕암교회는 오계환을 장로로 세웠는데 교회와 하나님 앞에 충성할 것을 눈물로 서약했다.
1950년 6.25발발하자 모두 피난가는데 담임전도사가 피란을 권면했지만 "장로가 교회를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죽으면 순교니 오히려 영광이지요"하며 피란가기를 거부하고 교회에 들어가 땅굴을 파고 기도하며 교회를 사수하든 오장로는 9.28수복이 방송되자 서둘러 퇴각하든중 누군가가 교회 땅굴에 있다는 제보를 받은 공산빨지산 10명에 의해 교회마루밑 땅굴에서 끌려나오면서 몽둥이로 얻어맏고 음력9월 9일 체포되었다. 그동안 친정에 아이들과 함께 피신했던 부인과 어린 자식들이 잡혀오는 모습을 보면서 오장로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순교하면서 "어린아이들만이라도 살려주옵소서"라고 기도한 오장로님의 기도로 탈출한 아들 오균열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용성마을 뒷산에 죽창과 칼과 몽둥이에 찔려 생매장되었다.
수복 후 오장로 시신을 발굴하는 중에 임신8개월의 부인 김금이 집사와 엄마등에 엎여간 두살짜리 딸 정이가 함께 있었으며 부안 평광교회 시무하던 오장로 숙부 오병길전도사와 그의 아들도 함께 있었으니 한 가문에서 여러명의 순교자가 순교의 멸류관을 쓴 것이다.
그의 기도로 탈출한 당시 중 2였던 아들 오균열은 후에 예장보수개혁총회 총회장을 역임, 순교자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그의 아들 세종이도 인천에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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