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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총무로 활동
1905년 미국에서 내한하여 한국기독청년회에서 직업교육과 학생 및 농촌운동 개척자로 헌신했다.
그는 1878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으며, 네브래스카 오마하(Omaha) YMCA 학생부 간사로 활동했다. 1905년 내한하여 1906년 한국 YMCA 부총무로 봉직하면서 직업교육을 주도했다. 직업교육 과정은 목공, 철공, 화공, 염색, 그림, 도자기, 제화 등 전문교육이었다.
이 무렵 직업교육은 하나의 새로운 전문직 창출(創出)을 위한 교육이었다. 특히 강연회와 토론회는 큰 성과가 있었다. “산업교육의 필요성, 과학교육의 필요성, 산업의 기능과 국가 발전, 기업과 사회 발전, 복지사회의 건설” 등 다양한 주제의 강연회와 토론회는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으며 청년들의 사회 참여를 유도했다.
이때의 강연회와 토론회 분위기에 대하여 질레트(P. L. Gillett) 총무는 “YMCA의 강연회와 토론회는 다른 데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미국에서도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없다. 37회의 토론회와 38회의 강연회는 300명 내지 400명의 청중이 모여들어 강당은 언제나 꽉 찼다.”라고 보고했다.(자료: 한국YMCA운동사)
그 후 브록크만은 1908년 황성기독청년회에서 공동총무로 활동했다. 그리고 1914년, 조선중앙 YMCA와 9개 학생 YMCA 등을 포함하여 조선 YMCA연합회(현, 한국 YMCA연맹)를 조직하여 초대 총무로 선임되었다. 이승만 박사와 함께 상류 지식층 청년들을 상대로 YMCA 학생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서민 중심의 교회였기 때문에 그들은 지식층을 수용하기 위하여 활동했다. 평양 숭실, 선천 신성, 광주 숭일, 전주 신흥, 군산 영명학교 등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 YMCA를 조직했다. 1910년 6월, 최초의 학생 하령회(夏令會, Summer Conference)의 주역을 담당했다.
1911년 6월에는 개성에서 전국 21개 학교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2회 하령회를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항일(抗日)과 애국(愛國)을 다짐했다. YMCA 하령회 때문에 그는 105인 사건과 연루되었다.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모사(謀事) 했다는 것이다.
전택부 선생은 이 사건을 "서북지방의 기독교인들과 신민회 회원들이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러 갈 때 암살하려고 음모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YMCA 세력과 학생 Y가 미워서 꾸며낸 것도 사실이다."라고 했다.(자료: 양화진 외인열전)
105인 사건은 1911년 11월 11일 선천 신성학교 학생과 선생을 검거하여 서울로 압송한 사건 등에서 비롯된다. 여하튼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저다인(L. L. Gerdine) 회장은 강제 사면되고, 질레트 총무는 국외 추방되었으며, 이승만 박사는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브록크만은 YMCA 사업에 너무 열중하다가 35세 때(1912)에야 친구들의 권유로 R. S. 브록크만 (Mrs. R. S. Brockman) 부인과 만혼(晩婚)했다.
그 후 1916년부터 협동 총무로서 1922년까지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선교잡지 《조선 청년》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23년, 신흥우 총무와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미국 국제 본부를 방문하여 1925년부터 10명의 농촌 기술자를 미국과 캐나다에서 파송 받고, 재정 원조도 약속 받기로 하는 등 성공적인 과업을 이룩했다. 그가 주도한 지도자협의회는 농촌운동 역사상 획기적인 것이었다.
1927년, 과로로 인한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했다. 1929년 6월 10일 미국에서 별세하여 프린스턴신학교 장(葬)으로 집례되었다.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으로 돌아왔다.
묘비에는 '24년 간 한국의 증인 일꾼, 평화의 인, 친구(For twenty four years in Korea, Seer Builder, Peace Maker, Friend)'라 기록되었다. 그는 평생을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한편 양화진 제1묘역에는 그의 어머니(1840-1915)와 딸(1914-1922) 묘지가 있어 브록크만 가(家) 3대의 묘지가 있다. 그의 어머니(Mrs. Brockman, W. A.)는 1840년 2월 26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1915년 3월 7일 한국에서 별세했다. 딸 바바라 브록크만(Brockman, Barbara)은 191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22년 8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형 플렛쳐 S. 브록크만(Brockman, Fletcher Sims, 1874-1939)은 중국 YMCA 총무로 활동하면서 1903년 한국 YMCA 창설 자문위원회 특별 강사로 내한했다. 1903년 10월 28일 황성기독청년회 창설공로자이다. 1905년 동생 브록크만의 한국 파송도 주선했다. 그 뒤에도 가끔 YMCA 초빙을 받아 중국에서 한국에 입국하여 지도자 훈련 등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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